발행인의 글 — 조용한 뚝심, 그리고 그 미소 뒤의 사람
Joon Chung 시장님과의 인연은 수년 전, 내가 Governor Phil Murphy를 인터뷰하던 자리에서 시작됐다. 그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 이후, 그녀는 맘앤아이가 진행한 수많은 정치인 인터뷰의 자리마다 묵묵히, 그러나 분명한 존재감으로 함께해 주었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 색깔에 기울지 않고, 어느 권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람과 커뮤니티만을 생각하는 그 자세가 늘 인상 깊었다.
Harrington Park의 시의원으로, 그리고 지금은 시장으로. 매 자리마다 그녀는 자기 자리를 지켰다. 흔들리지 않고, 흐려지지 않고. 어떤 분에게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어떤 권력 앞에서도 작아지지 않는 그 조용한 뚝심이 — 솔직히 말하면, 완전 걸크러시였다.
오랜 세월 백인 부유층이 주를 이루어 온, 그래서 한 번 자리 잡은 것은 좀처럼 바꾸지 않는 그 동네에서 — 물론 지금은 동양계가 많이 들어왔지만 — 한국 여자가, 그것도 시의원부터 한 단계 한 단계 꼼꼼히 쌓아올려 시장의 자리까지 갔다. 그것도 무소속(Independent)으로. 당의 머신이 굴리는 길을 거치지 않고, 자기 발로, 주민의 표로.
조용한 카리스마. 따뜻하면서도 정교한 미소. 그 미소 뒤에는 그녀를 조용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 있다. 사람과 커뮤니티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시장님. 매번 그녀는 맘앤아이의 수많은 정치인 인터뷰의 자리에 함께 서 있었지만 — 오늘은 처음으로, 인터뷰를 당하는 자리에 앉았다.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 꽃이 피었다.
그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흘렀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동네의 역사가, 그리고 한인 1.5세대가 미국에서 어떻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 그녀의 단정한 손짓 하나하나에 담겨 흘러나왔다.
— 발행인 Sylvia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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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rington Park 보로홀(Borough Hall) 안에는 카운슬 체임버(Council Chamber)라는 방이 있다. 1904년 마을이 인코퍼레이트(incorporate)된 이래, 한 명 한 명의 시장 사진이 벽을 따라 걸려 있는 방. 가장 가운데, 가장 큰 자리에는 'Mayor Joon Chung'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녀가 그 방을 처음 들어간 건 17살 때였다. 시장이 아니라 — 통역사로.
그 자리에, 그녀는 지금 시장으로 앉아 있다.
이 한 줄의 그림이 그녀의 인생 전체를 설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마을이 한 사람을 어떻게 키우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어떻게 마을에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두 시간 넘는 인터뷰 내내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서 대체로 가만히 있었다. 말할 때 손짓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단정한 손짓 하나하나 안에 심상치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17살, 등에 땀이 흐르던 그 자리
1985년 무렵이었다. 1983년 미국에 온 지 3년이 채 안 됐을 때다. 그녀는 이제 막 고등학교 시니어가 됐다. 한인 인구가 막 늘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주재원들이 들어오고, 퀸즈에서 살다가 뉴저지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러다 보니 트래픽 티켓이 나오고, 사고가 나고, 코트에서 통역할 사람이 필요해지는 일들이 생겼다.
어느 판사가 학교에 물었다고 한다. "혹시 통역할 학생이 있냐." 학교는 그녀를 추천했다. 그녀는 "난 못한다"고 했다. 영어도 어려운 시기였고, 어른들이 겪는 '리걸 월드'의 단어를 알 리 없는 17살이었다.
"그런데 제가 결정을 한 이유가, 한 번 가서 일하면 30분이건 한 시간이건 50불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녀가 그때를 회상하며 웃었다. 친구들이 맥도날드에서 시급 3불을 받던 시절이다. 50불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 그 마음으로 덜덜 떨면서 한다고 그래갖고 그 콜트룸에 들어갔는데, 등에서 땀이 흐르더라고요."
그녀를 부른 판사는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준, 너는 변호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디펜더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야. 너는 나를 위해 일하는 거다." 그 말이 그날의 떨림 속에서 그녀에게 한 줄의 닻을 박았다.
첫 케이스는 트래픽 코트였다. 검사 측 여성이 묻는 말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끔찍했다. "저런 말을 어떻게 해." 그녀는 그날 '다시는 안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판사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Tenafly에서도, 다른 타운에서도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어떨 때는 위험한 케이스도 있었다. 옆집 수영장 커버를 칼로 다 찢은 여자를 통역할 때는, 판사가 어린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서 "집 주소 말하지 말라" 신신당부했고, 가는 길에 경찰을 따라붙게 했다.
그렇게 끌려다니듯 다니던 그녀에게, 판사는 끝내 좋은 대학 추천서를 써주었다.
"제가 시장으로서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근데 그게 제가 훌륭한 일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저한테 기회를 주셨고, 엉망진창으로 하는 저를 '못한다' 그러는 게 아니라 — 그 가능성을 보고 계속 도와주신 거예요."
그녀가 잠깐 멈추고 덧붙였다.
"그게 진짜 커뮤니티거든요."

Harrington Park가 키운 아이
1983년, 15살의 그녀는 JFK 공항에 내렸다. 아버지가 먼저 와서 집을 준비해 두고 계셨고, 그 길로 차를 타고 곧장 향한 곳이 Harrington Park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지금까지 같은 마을에 산다.
처음에는 불편한 동네였다고 했다. 서울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던 15살에게,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미국 외곽의 작은 마을은 "거의 감옥 생활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다가와 주었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의 아버지가 — 훗날 그녀가 결혼할 무렵, 시장이 되었다. 토요일이면 그 집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그 친구 아빠. 그분이 32년간 Harrington Park의 시장으로 마을을 이끄셨다. 그녀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허리를 다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셨을 때, 그 시장의 부인이 — 당시 영어 튜터였던 분이 — 한걸음에 달려와 "Second Opinion을 받아야 한다"고 그녀를 끌고 나갔다. 그분이 카운슬맨이었던 남편에게 전화해, 마을 앰뷸런스로 아버지를 더 큰 병원으로 모셨다. 결국 아버지는 수술을 안 해도 되는 상태로 회복하셨다.
"제가 그때 처음으로, 우리 커뮤니티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봤어요."
그리고 또 한 번. 2019년, 어머니가 알파인 집에서 탈수로 쓰러지셨을 때 — 알파인 집에 도착한 앰뷸런스가 Harrington Park 앰뷸런스였다.
Northern Valley의 마을들은 '뮤추얼 에이드(Mutual Aid)'라고 해서, 요일별로 서로 응급 출동을 분담한다. 그날은 화요일이었고, 화요일은 Harrington Park의 차례였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라이드였다.
"저희는 Harrington Park가 시작이고 끝이에요. 너무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이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저는 Harrington Park가 키운 아이예요. 제가 시장이 된 건 — 제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Harrington Park가 저를 키우셨기 때문이에요."

코리 부커와 같은 학년
Harrington Park의 인구는 5,000명. 뉴저지에 있는 564개 뮤니시팔리티(Municipality) 중 작은 마을 하나다. 비즈니스가 거의 없다. 주민들이 비즈니스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가 많이 다니는 것도 싫어하고, 변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1904년에 생긴 마을은 처음 50년대까지 거의 한 인종이었고, 1970년대가 되어서야 다른 커뮤니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70년대에 Harrington Park로 이사 온 한 가족이 있었다. 코리 부커(Cory Booker)의 가족이었다. 당시 어떤 부동산 중개업자도 그들에게 빈집을 보여주지 않았다. "빈집이 없다"고만 했다. 결국 정부가 다른 부부를 '대리'로 위장시켜 클로징을 진행했고, 그렇게 부커 가족은 Harrington Park에 들어왔다.
코리 부커는 그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가 됐다. 그녀와 같은 고등학교 동급생이었다 — 67년생. "코리는 69년생인데, 공부를 좀 잘해서 일찍 들어왔어요." 그녀가 웃었다. 같은 학년에서 — 지금의 미국 상원의원 코리 부커, 마을의 파이어 치프(Fire Chief), 앰뷸런스 캡틴이 다 나왔다.
코리 부커가 상원의원으로 처음 당선된 다음 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Harrington Park 학교에 와서 프레스 컨퍼런스를 여는 것이었다. 두 해 전 그녀가 그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 아직도 Harrington Park에 있다"고 했다. 그 친구가 한국 친구였다.
"리더는 '나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예요.' 우리 타운 분들은 우리 타운 아이들을 선택하세요."
무소속이라는 선택
그녀는 시의원으로 2012년에 처음 카운슬에 들어갔다. 12년의 시간이 흐른 뒤, 평생 시장이셨던 그분 — 친구의 아버지 — 이 임기 중에 돌아가셨다. 그녀는 2024년, 시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것도 어느 한 당의 티켓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인디펜던트(Independent)—무소속'으로.
정치학을 전공한 그녀가 무소속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 타운은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타운'이에요. 친하게 지내던 이웃 사이에 옆집이 한쪽 정당의 팻말을 꽂으면 — 그 안에서 분열이 생기기 시작해요. 우리 마을이 지킬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 무소속이라고 생각했어요."
Harrington Park는 비즈니스가 없는 만큼, 마을 운영의 거의 모든 것이 '볼런티어'로 굴러간다. 소방서, 앰뷸런스, 어린이 스포츠 —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 동네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봤다. 2024년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시장 선거에서, 무소속에게 가장 불리한 해였음에도 — 그녀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겼다. 투표용지에서 양당이 컬럼 1, 2번에 자리한 옆에서, 그녀의 이름은 컬럼 7번 즈음에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 표를 던졌다.
선거 전, 버건 카운티의 한 정당은 Harrington Park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강력한 후보들이 위에 줄을 섰고, 분위기는 "이번에 Harrington Park는 우리가 다 가져간다"였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애널리시스(Analysis)에서 그러시더라고요. 이건 어느 정당이 이긴 게 아니라, '그냥 준이 이긴 거다'라고. 정당 보고 뽑으신 게 아니라, 준을 보고 뽑으셨다고요."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무소속이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을 뽑아주는 우리 타운 주민들이 대단하신 거예요."
12년 — 시의원으로서 배운 것
그녀가 시의원으로 처음 카운슬에 들어간 것은 2012년이었다. 그때부터 시장이 되기까지 12년 — 그 시간이 그녀를 가장 깊게 키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할 수 있을까'라고 망설였다고 한다. 평생 누군가를 보조하는 자리가 편했고, 앞에 나서는 자리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소방, 앰뷸런스, 경찰, 학교 — 마을의 모든 분야가 그녀를 거쳐 갔다.
그 12년 동안 그녀가 주도해 해낸 일 중 마을 주민들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가졌던 것이 하나 있다. 페어 셰어 하우징(Fair Share Housing) — 뉴저지가 각 마을에 부과한 저소득층 주택 의무 비율 문제였다. 작은 마을 Harrington Park에는 무려 202채를 지으라는 번호가 떨어져 내려와 있었다.
"202채를 지으면 우리 마을이 흔들려요. 인구 5,000명의 마을에 그 정도 규모는 견딜 수 없어요."
그녀와 카운슬은 끈질기게 법정 시스템과 페어 셰어 하우징 측과 끊임없이 협상했다. 결국 — 마을은 단 한 채도 새로 짓지 않아도 되는 세틀먼트(settlement)에 도달했다. 잠재적인 디사빌리티를 가진 시니어를 위한 그룹홈, 그리고 포베드룸짜리 주택 하나의 '포텐셜(potential)'만 남겨두는 조건으로.
행정적으로는 큰 성공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가 시장으로서 가장 보람 느꼈던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돌아오게 한 일
마을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한 분이 있었다. 연세가 많은, 파트타임 직원. 와이프도 없고 자녀들도 멀리 살았다. 어느 날부터 그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다녔다고 한다. "내가 없어지면 이분한테 연락해라"는 메모와 함께.
다른 스태프 멤버를 통해 그녀에게 그 소식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은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경찰을 부르거나,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거나, 행정적 조치를 넣은 게 아니었다. 그녀가 한 일은 마을의 시니어 그룹에 단체 멤버 한 명에게 이메일을 보내, 그분을 초대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한 것이었다. 또 마을의 주니어 우먼스 클럽(Junior Woman's Club)에도 연결해 누군가가 그분을 정기적으로 챙길 수 있도록 부탁했다.
얼마 전 그녀가 마을의 로컬 처치(local church)에 들렀을 때, 그녀는 그분이 거기서 굉장히 액티브하게 계신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페어 셰어 하우징 셰틀먼트를 잘한 게 제 레쥬메에는 더 보기 좋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한 분이 다시 액티브 멤버로 돌아온 게 제일 보람이에요. 사람에게 닿는 일이거든요."
또 하나의 이야기.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신 인도계 어머니가 보로홀에 찾아오셨다. 남편이 모든 서류 작업을 하시던 분이어서, 그분은 어떻게 페이퍼워크를 처리해야 하는지 막막했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 남편의 장례식 날, 집이 비어 있는 사이 강도까지 당했다는 것이었다.
Harrington Park의 행정 어드미니스트레이터(Borough Administrator)가 마침 인도 출신이었다. 그분이 나서서 모든 일을 도와드렸다. 그녀는 이런 직접적인 고마움의 순간이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격차를 메워주는 일이 — 마을 정부가 진짜로 존재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럴 때는 정말 타운 정부밖에 없어요. 그분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나 다음은 준이다"
32년간 시장이셨던 그분 — 그녀의 친구 아버지 — 은 입버릇처럼 키 멤버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 다음은 준이다."
어느 누구도 그 말이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장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마을은 곧장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가 출마한다, 누가 나간다, 시장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이다 —.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노렸다.
그녀는 그 옛 시장에게 한 약속이 있었다. "우리 무소속(Independent) 무브먼트는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약속.
"솔직히 제가 시장이 되려고 나간 게 아니에요. 그 무소속 티켓이 무너지지 않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그때 저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자기 안에 그런 야심이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CEO 같은 거 —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어요. 저는 누구를 잘 보조하는 스타일이에요. 굉장히 로열(loyal)하게 보조하는 스타일이죠." 그런 그녀가 자꾸 리드(lead)를 받게 됐다고 했다. 시간이, 그리고 사람들이 그녀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그래서 그녀는 다음 자리를 묻는 사람들에게 늘 같은 답을 한다.
"다음 자리에 대한 야심이 저한테는 없어요. 저한테 있는 건 사명감이에요. 야심이 아니라."
의무는 알고, 권리는 모르는 — 1.5세, 2세에게
인터뷰 중간, 한 대화가 그녀와 나 둘 다 멈추게 만든 순간이 있었다. "우리 한국 아이들이, 권리를 몰라요. 의무는 알아요. 한국적인 생각이죠. 그러니까 어디 가서 즐겁지 않고 살려는 멘탈(mental)이 너무 강해요."
그 말 끝에 그녀와 나는 거의 동시에 외쳤다.
"오늘의 헤드라인이 나왔다."
이민자들은 의무는 안다. 그러나 권리를 모른다. 1세대가 그렇다는 건 어쩌면 이해할 수 있다 — 영어가 어려웠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문화에 맞지 않았던 분들이니까. 그러나 1.5세, 2세에 와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 그건 다른 문제다.
그녀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했다.
"권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거예요. 내가 100% 코리안인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해요. 어느 누구도 '너는 70%야, 너는 20%야' 할 권리가 없어요."

이민자가 자기를 '이민자의 틀'에 가두는 순간 — 가능성은 거기서 끝난다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당당한 시민이고,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불이익을 당했을 때 그것을 밀쳐내는 것 — 그게 권리다. 그것을 행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세컨드클래스 시리즌(Second-Class Citizen)'에 머문다.
"법치 국가에서는 법을 잘 사용하면, 살인을 해도 살인자가 안 돼요. 법을 잘못 쓰면, 살인을 안 했는데도 살인자가 돼요. 내 권리를 알고 잘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세컨드클래스 시리즌이 되는 거예요."
내 이념(ideology)이 있어야 — 남의 이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녀가 인터뷰 내내 가장 자주 돌아온 단어가 '이념(ideology)'이었다. 정확히는 — '내 이념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우려.
"지금 정치 신(scene)이 그렇게 돼 있어요. 자기 이념이 없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이념을 그냥 이미테이트(imitate)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극우, 극좌가 생기는 거잖아요. 본인 이념이 없으니까, 남의 이념을 계속 쫓아가는 거예요."
내 이념이 있어야, 남이 왼쪽으로 가도 '그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 능력이 지금 너무 없어 보인다고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 자리에 대한 정의를 단호하게 내렸다.
"저는 정치하려고 스테이트(state)에 나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타운 안에서만 시장인 거고, 바깥에서는 정치적 성향을 띄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한인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 그때는 카드를 다 써야죠. 그게 우리에게 주신 권리를 행사하는 거니까요."
그것이 그녀가 보는 리더십(leadership)이었다.
"나의 로열티(loyalty)는 — 내가 잘 나가는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불이익을 당했을 때 누가 일어나느냐에서 생깁니다."
"Are you Korean?" — 6살짜리도 아는 것
시장이 된 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마을 엘리멘터리 스쿨(Elementary School)에 가서 2학년, 3학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름은 'Read Across America'.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이들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한다. 미국 아이들은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었어요?",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같은 질문들을 한다.
그러나 한인 아이들의 첫 질문은 늘 같다.
"Are you Korean?"
그녀가 "Yes, I am Korean"이라고 답하면, 아이들은 꼭 이렇게 대답한다.
"I am Korean too."
6살, 7살짜리 아이들도 안다. 한인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자기도 아줌마에게 알리고 싶은 거다 — '나도 코리안이에요.'
그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작년에 그녀는 한인 유스(youth)를 위한 이벤트에서 상원의원 앤디 김(Andy Kim)을 만나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앤디 김 의원에게 한 말은 분명했다.
"6살짜리도 아는 걸, 정치가들이 모르면 큰 문제죠. 우리는 한인 아메리칸이에요. 민주당, 공화당을 떠나서 — 여섯살짜리도 아는 걸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되죠."
그녀에게 한인 사회의 일은 '개인적인 일'이다. 어떤 한인 사회의 이슈가 즉시 그녀의 책상 위에 올라오는 이유는 정확히 그것이다.
"한인 사회에 있는 일은 나의 퍼스널(personal)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해요. 6살짜리가 연결고리를 알아보는데,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건 말이 안 되죠."
김치 냄새가 부끄러웠던 시절을 지나
그녀가 어릴 무렵의 학교를 회상하면, 한국 음식을 점심으로 가져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김밥 한 줄에서 풍기는 고추장 냄새, 김치의 냄새 — 그것이 자존심에 상처가 되던 경험. 한국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시선으로 보이던 시절.
최근 오스카(Oscar) 시상식에서 한국계 영화인들이 무대에 오르고, K-콘텐츠가 연단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 그녀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무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울었던 이유는 단지 성공해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김밥을, 한국 음식을 가져가서 부끄러워하던 그 시절을 우리가 알아요. 지금의 K-컬쳐는 — 그 부끄러움이 없어진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그게 꿈 같은 이야기예요."
그녀의 두 자녀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두 아이가 "100% 미국인이지만, 100% 한국인"이라고 그녀는 자주 말한다. 두 정체성이 서로를 깎아내리지 않고 공존하는 것 — 그게 그녀가 자녀들에게, 그리고 마을 학교의 모든 한인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1.5세'라는 단어는 사실 한국어 사전에도, 미국 사전에도 없는 단어다. 이민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름이다. 1세대 부모와 빠르게 미국 사회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기 자리를 설명할 단어가 없었던 세대의 자기 이름.
"우리 아이들이 '2세', '3세', '4세'라고 구분되지만 — 6살 한인 아이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걸 보세요. 그게 진실이에요. 우리는 연결되어 있어요. 그 연결을 잊지 않는 게 우리의 고향이에요."
16년 — 한 잔치가 학교를 바꾸기까지
Harrington Park 학교에서는 16년 전부터 추석 잔치를 한다. 처음 시작은 작았다. 마을 공원에 한인 가족 몇 집이 모여, 식구마다 빈대떡과 전을 굽고, 아이들이 서로 뛰어놀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 그 정도였다. 어느 한 어머니가 "이걸 학교에서 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학교 행사로 옮겨졌다.
처음 학교에서 했을 때는 소규모였다. 한인 아이들이 북춤을 추고, 태권도 시연을 했고,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서는 정도. 부모님들이 음식을 준비해오시고, 이른바 극성 엄마들이 자원해 행사 진행을 도왔다. 그때는 그게 한인들의 '자랑스러운 자리'였다. 다른 학생들은 그저 구경꾼으로 앉을 뿐이었다.
올해 그녀는 그 자리에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한복을 입은 한인 아이들이 무대에 서서 K-pop 그룹 블랙핑크의 제니가 부른 'Solo', 그리고 영화 'K팝 데몬 헌터스'의 삽입곡 'Golden'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무대 아래에서는 — 한인이 아닌 학생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그들이 열광한 이유는 그것이 '한국 것'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기들이 사랑하는 음악을, 그 자리에서 만나고 있어서였다.
"이게 제가 꿈꿨던 '노멀라이징 디버시티(Normalizing Diversity)'예요. 다양성을 '존중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게 너무 정상화돼서 같이 셀러브레이트하는 모습. 40년 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잖아요."
이민자 시장으로서 — 모든 커뮤니티에게
몇 년 전, 이스라엘과 하마스(Hamas) 사이의 충돌이 터졌을 때 — Harrington Park의 유대인(Jewish) 커뮤니티는 깊은 불안에 빠졌다. 로컬 커뮤니티가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항의가 나왔다. 그 반대로, "여기는 이스라엘이 아니지 않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지역 주민들도 있었다.
그녀의 시장으로서의 답은 정확히 그녀의 인생에서 나왔다.
"제가 이민자 시장으로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게 — 우리 아이들이 100% 미국인이지만, 100% 한국인이기도 한 것처럼, 유대인 이웃들에게 이스라엘은 그저 먼 나라가 아니에요. 그들의 일부예요. 그것을 이해해주는 과정이 바로 커뮤니티예요."
그녀는 그 사이에서 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호스티지(hostages)를 위한 자리였다. 다른 주민들이 그곳에 함께 서서, 유대인 이웃들의 과거를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이 이민자 시장이 생각하는 정체성은 '녹이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에 이민자로 왔을 때 '멜팅 팟(Melting Pot)'이라며 서로에게 흡수시키려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 자기 정체성이 강하고 어디서 왔는지 분명한 사람이 더 좋은 시민이 되는 거예요."
변화는 천천히 온다
최근 Harrington Park 경찰서가 새로운 경찰 한 명을 채용했다. 지원자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그 중에 여성 지원자도 이례적으로 많았다. 폴리스 커미디 미팅에 함께한 카운슬맨 세 분이 인터뷰를 했다. 세 분 모두 보수적인 성향의 분들이었다.
최종 추천된 두 사람은 — 둘 다 여성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왜 이 두 분이에요?" 답은 단순했다. "가장 퀄리티가 높은 지원자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선발된 경찰 중 한 명은 한인 여성이었다. Harrington Park 역사상 최초였다.
그전에 마을은 이미 한인 남성 경찰을 채용한 적이 있었다. 2013년이었다. 그 경관은 나중에 버건 카운티 검찰청에 스카우트되어 나갔다. 그가 채용됐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준의 네퓨(Joon's nephew)"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보수적인 분들이 변하시는 거예요. 제가 변하라고 해서가 아니에요. 변할 때가 되신 거죠. 그게 커뮤니티예요. 우리가 피켓을 들고 나가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거기에 살면서 관계 안에서 변화가 되시는 거예요."
Keep everybody safe. Keep everybody kind.
어느 날 1학년 아이들이 보로홀에 견학을 왔다.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물었다. "왜 로컬 가버먼트(local government)가 필요해요?"
그녀는 그 자리에서 답했다.
"Keep everybody safe. And keep everybody kind. — 주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그리고 이웃끼리 우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게 타운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에요."
산책을 나가면 강아지 똥이 그대로 있다. 화가 난다. 그래서 법이 필요한 거다. 옆집과 가장 문제가 많은 두 가지 — 나무, 그리고 물. 늦은 밤 시끄러운 파티. 그런 사소한 일들이 사실은 이웃 사이의 감정을 망가뜨린다. 그래서 마을 정부는 그 작은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다.
"타운 정부가 주민의 삶의 질을 만지는 거예요. 사실 어떻게 보면 — 대통령보다, 주지사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의미가 있는 자리죠."
클로징
두 시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나는 한 가지를 다시 물었다. 지금의 시장 준 청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Harrington Park가 키운 아이예요. 제가 선거를 한 게 아니에요. Harrington Park가 저를 키우신 거예요."
시장이 시장으로 본인을 만들었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기를 키운 게 '나의 마을이다'라고 말하는 시장은 드물다. 그것이 — 32년 시장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다음은, 준이다"의 진정한 의미였을 것이다.
그녀가 보로홀을 나설 때, 카운슬 체임버에 걸린 시장 사진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1904년부터 한 명, 한 명. 가장 마지막이 그녀의 사진이다. 그 사진 옆 이름표에는 어떤 정당 표시도 없다. 그저 — 'Mayor Joon H. Chung'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17살, 등에 땀이 흐르던 그 콜룸의 그 자리. 어느덧, 그녀가 시장으로 앉아 있다.
Harrington Park가 키운 아이가, 이제 Harrington Park를 키워가는 자리에 와 있다.
Joon H. Chung은 Borough of Harrington Park, NJ의 시장이며, Good Neighbors Ministry의 회장이자, NJ League of Municipalities의 'Women in Politics' 상을 이민자로서 첫 수상한 인물이다. 1985년 고등학교 시니어 시절부터 그녀가 알아온 Harrington Park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하이라이트
"50불 받고 들어간 그 콜트룸에서 등에 땀이 흘렀어요. 지금 그 자리에 시장으로 앉아 있어요. 제가 훌륭해서가 아니에요 — 많은 분들이 나의 가능성을 보고 도와주신 거예요."
"어머니의 마지막 라이드가 Harrington Park 앰뷸런스였어요. 저희에게 Harrington Park는 시작이고 끝이에요."
"리더는 나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예요. 우리 타운 분들은 우리 타운 아이들을 선택하세요."
"제가 무소속이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을 뽑아주는 우리 타운 주민들이 대단한 거예요."
"다음 자리에 대한 야심이 저한테는 없어요. 저한테 있는 건 사명감이에요. 야심이 아니라."
"Are you Korean? 6살짜리도 알아요. 한인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정치가들이 그걸 모르면 큰 문제죠."
"이민자들은 의무만 알아요. 권리를 몰라요. 권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거예요."
"내 이념이 없으면, 남의 이념을 따라가게 돼요. 그래서 극우, 극좌가 생기는 거예요."
"Keep everybody safe. Keep everybody kind. — 그게 타운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에요."
"저는 Harrington Park가 키운 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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